신영오 국장
한국인은 술을 좋아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인은 술을 통해 마음을 나눈다. 우리는 기쁜 날에도 술잔을 들고 슬픈 날에도 술잔을 비운다. 결혼식장의 축배와 슬픈 날의 술은 전혀 다른 자리에서 있지만 그 술잔에 담긴 마음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술이라는 매개에 담아 서로에게 건네는 것이다.
사진=경제엔미디어
한국 사회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다. 술은 관계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감정의 빗장을 푸는 장치이며 때로는 말보다 솔직한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취중진담’이라는 말을 하며 그 표현은 노래 제목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맨정신으로는 꺼내기 어려운 말들이 술기운을 타고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술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술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과 감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비춰온 문화이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오늘은 그냥 마시자’라는 말은 긴 설명을 대신한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을 짐작하고 술잔을 기울인다. 한국인의 술자리는 대개 ‘같이’의 영역에 속해 있다.
기쁠 때의 술은 축제다. 합격과 승진, 결혼과 출산, 오랜만의 재회 같은 인생의 좋은 순간들은 술과 함께 완성된다. 술은 기쁨을 나누는 도구이자 좋은 기억을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이며 술잔이 오갈수록 웃음은 커지고 축하의 말은 더욱 진해진다.
마음 아픈 일이 있거나 어떠한 일이 잘 안될 때에도 술은 곁에 있다. 술은 슬픔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그 슬픔이 지나갈 시간을 벌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오늘은 술이 필요하다.’ 그 말 속에는 버텨보겠다는 의지도 함께 담겨 있다.
‘취중진담’, 술에 기대어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허락해 왔다. 술김에 나온 고백과 사과와 눈물은 때로는 맨정신의 말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체면과 역할, 직함과 나이를 잠시 내려놓고 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때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진담이다.
물론 술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술이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술 문화에는 언제나 절제라는 단어가 함께 따라붙는다. 오래전부터 한국인은 ‘과음’을 경계했고 ‘적당히’를 미덕으로 삼아왔다.
최근 한국의 술 문화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강요 없는 회식, 혼술과 홈술, 와인과 위스키, 그리고 막걸리에 대한 재조명까지, 술의 종류와 방식은 달라졌지만 술을 통해 마음을 나누려는 본질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각자의 잔을 들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여전히 술자리에서는 우리들의 삶과 인생 이야기가 오간다.
“좋은 술이란 많이 마시는 술이 아니라 즐겁게 적당히 마시는 술”이다. 관계를 해치지 않고 감정을 흐리지 않으며 함께하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술, 그 선을 지킬 때 술은 비로소 문화가 된다.
한국인의 삶에는 언제나 술이 있었다. 논두렁의 막걸리에서 포장마차의 소주, 맥주, 그리고 위스키와 와인에 이르기까지 술의 얼굴은 바뀌어 왔다. 그러나 술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한 잔의 술에는 위로와 축하, 사과와 고백, 작별 그리고 연대가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술은 때로는 모든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우리는 술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것이 한국인의 술이다.
좋은 친구들과, 좋은 분들과 술 한 잔이 생각나는 밤이다.
[경제엔미디어=신영오 국장]